"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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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반갑습니다. 요한복음 세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함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되었다”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한번 정리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였습니다. 이 로고스는 태초 이전부터 계셨고 창조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세상에 비취는 빛이셨습니다. 그 빛이신 로고스가 당신이 만든 세상에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육신으로 오신 로고스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씀, 즉 로고스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로고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또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지요.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놀라운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역사 신학적인 내용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육신’이라는 단어에 쓰인 말은 고깃 덩어리인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싸르크 σὰρξ”라는 단어입니다. 결국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이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고상하게 쓰지 않고, ‘고기 덩어리’라고 했을까요?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초대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이단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이고 또 하나는 가현설이었습니다. 먼저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영적인 나라로, 육체라는 것은 영을 가둔 천박한 ‘감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감옥과 같은 땅과 육신에서 탈출하여 하늘과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가현설을 말하는 이들은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라 /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강하게 육신이 되었다, 진짜 살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는 뜻의 단어를 쓴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도 요한은 ‘거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장막을 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장막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시적인 임재의 상징으로 주신 것이 바로 장막이었습니다. 그 장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 인간들에게 보이시고 만나주시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 장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처소였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가운데 장막을 치고 그들을 만나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으로, 성전으로 거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씀과 같이 장막을 친 곳이 다름아니라 우리 인생입니다. 이 한 구절속에 정말 엄청난 역사가 녹아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성전이신 예수님과 연합된 기가막힌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인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을 이룬 초신비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영원까지 입니다. 또 언제부터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요? 영생 아닌가요? 영생은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살게되는 것만이 아니에요. 영생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영생은 날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구요, 주님과 같이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빌립보서 2:5-8절 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높임을 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시고 낮아지셨습니다. 그 낮아짐의 결국은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낮아지심, 겸손의 마음입니다. 죽어지는 심령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낮아지신 하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게 역설이에요. 나의 이익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짓밟고 올라가려 하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과 긍휼이 많은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참되고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영생을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은 세상을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5절입니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을 사랑하는 세상은 빛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세상 가운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낮아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태생부터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어둠으로 가득한 땅에 빛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을 맛보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을 고치겠다고 / 지독히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 성육신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세상을 떠난 레이첼 헬드 에반스가 쓴 “헤아려 본 믿음”이라는 책에서 성육신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샌들을 신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샌들을 신은 하나님, 발가락 사이에 때가 낀 채로 돌아다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생각하면 할 수록 참 심오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8에서는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고 볼 수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예수님으로 보여주셨다구요. 그 모습이 “샌들을 신은 하나님” 즉 예수님이었던 것이지요. 성육신으로 하나님에게 얼굴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웃음, 손과 발, 마음과 정신은 모두 하나님이신 거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입니다.
샌들을 신었던 하나님,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지금 여기에 비움이 채움으로, 결핍이 부요함으로, 목마름이 해갈로, 어둠이 빛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시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가난하여 헐벗고, 질병과 속박에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흘리며 그들을 감싸주고 세워주고 치료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왜 지독하게 거룩하신 분이 스스로 죄인이 되셨나구요? 고기 덩어리 인간이 되었냐구요? 하나님 나라에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살라구요.
저는 요즘같이 제가 신앙하는 기독교가 부끄러울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여기저기에서 교회의 이름들이, 목사라는 호칭들이 얼마나 많이 들리는지요.
얼마 전에 한국 뉴스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방 어느 마을에 대형 카페가 생겼는데, 그 카페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조용했던 동네가 씨끄러워졌다구요. 그러면서 그 카페 건물을 보여주는데 가만보니 교회 건물인거에요. 대략 짐작이 가더라구요. 무리하게 교회 건축을 하다 감당못해서 커피집에 넘어간게 아닌가 싶어요.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그나마 카페가 되어서 그렇지, 예정대로 십자가가 올라갔다면 그 갈등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걸 은혜라고 해야 하나요?
그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눈물과 헌금이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자구요.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인가요? 이렇게 교회가 세워지다 말고 카페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한 쪽이 무너진 것인가요? 교회가 없던 곳에 교회가 세워짐으로 아픔과 상처와 갈등이 치유되고 봉합되어야 하는데, 더 큰 분쟁의 원인이 된다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료들과 최첨단의 기술을 동원하여 교회 건물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하나님 나라가 더 든든하게 다져지고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 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사이비 종교에 인생 전체를 내던진 사람들과 그들의 종교성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유린하는 악마와 같은 이들의 추악한 면면을 조금이나마 보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있지하면서 역겨움에 구토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나같이 스스로 신이다라고 외치며 높임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높아지려는 이들이 과연 그들뿐일까요? 강단에서 어줍잖게 하나님의 뜻은 이러하다면서 말하는 이들은 그들과 다를까요? 세상 어디에도 마음둘 곳 없어서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며 나온 연약한 이들은 외면하고,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이들이 과연 주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마음을 닮아 그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갈수록 화려해지는 교회는 과연 그들과 다를까요? 죽어야 하는 곳이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인데, 살아있다고 세상을 움직일 만한 능력이 있다고 외치는 교회가 과연 그들과 다를까요?
저 또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너무나 두려웠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데, 나는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살라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인가? 지금은 세상에서 뒤틀려진 기독교를 향해 얼마든지 욕바가지를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나에게 그런 세속적인 가치들이 부어진다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인 것이지요.
그런 두려움속에서도 또 한번 되새기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다”라는 말씀이에요.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그런 나인데, 그런 나와 같은 추악한 존재를 살리려 나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육신은 은혜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라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명령의 말씀인 것이지요.
팀 켈러 목사님은 우리가 품어야할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한없이 심오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에게 맞추마. 내가 달라지겠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너희들을 섬기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똑같이 고백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영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영생의 삶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높아지기를 포기하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섬기고, 우리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고난당하는 종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만 합니다. 어떻게요?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요.
하나님의 마음은 샌들을 신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그 샌들이 닳어질 때까지 발조치 씻을 여유가 없도록,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낮은 자를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낮아지는 모습! 그것을 주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주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의 나라입니다. 겸손의 나라입니다. 내가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낮은 자의 평강을 누리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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